[나를 키운 사람들 #1] 운봉의 기획자, 나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

 

💡 나의 대화 방식은 누구로부터 시작됐을까요? 

Q. 리더십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Q. 나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까요? ?

밴쿠버에서 비즈니스를 하며 제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어느 날 문득,진청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나를 키운 사람들, 내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던, 혹은 나를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의 친정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1. 빳빳한 셔츠와 올백 머리: 흐트러짐 없던 나의 우상

나의 고향은 전북 남원 운봉입니다. 남원에서도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닿는 지리산 바래봉 자락의 작은 분지.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여느 친구들의 아버지와는 달랐습니다.친구 아버지들이 흙 묻은 손으로 농사를 지으실 때, 나의 아버지는 늘 단정한 올백 머리에 칼날처럼 다려진 셔츠, 그리고 정갈한 자켓 차림이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고,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지리산 바래봉 자락의 분지 전경. 평화로운 농촌 마을과 웅장한 산맥이 어우러진 풍경

나의 뿌리, 전북 남원시 운봉읍 전경. 지리산 바래봉 자락이 포근하게 감싸 안은 이 분지 마을에서 중하교까지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2. 고향과 가족을 지킨 든든한 버팀목

아버지는 고향을 지키는 공무원이자, 가족의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었어요. 한때 전주 도청 발령이라는 기회가 왔음에도 아버지는 부모님 곁을 떠날 수 없어 그 길을 반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평생을 부모님 모시는 것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며 사신 분이었죠. 

그 시절의 큰아들들이 그러했듯, 아버지는 당신의 삶보다 가족의 안위를 먼저 살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는 든든한 기둥이었고, 동생들에게는 학업과 인생을 뒷바라지하며 모든 것을 믿고 상담할 수 있는 버팀목이셨습니다. 고향을 떠난 친구들에게는 변치 않고 자리를 지키는 고향 그 자체였으며, 친척과 동네 분들에게는 언제든 길을 물을 수 있는 현명한 상담가였습니다. 

제 기억 속 삼촌과 고모들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마다 늘 아버지께 의견을 꼭 여쭤보셨습니다.아버지는 타인의 고민을 남의 일로 치부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노력하셨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타인의 삶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서 계셨던 그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3. 아버지가 자식들을 설득하셨던 방법: "내 방으로 와라"

평소 여느 가족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버지가 저를 방으로 부르시는 순간, 우리 형제들은 모두 긴장했습니다. 그 호출이 떨어지는 날은 항상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이 필요한 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성적표가 배달되었을 때

  •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 피웠을 때

  • 대학교 진학 자체를 고민했을 때

  • 대학교 전공(신문방송학)을 정할 때

  • 첫 번째 직장(한화그룹)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본인의 방으로 부른 아버지는 꾸지람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논리 대 논리'로 맞서는 전략실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

아버지는 언제나 "아마 네가 요즘 이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구나, 이게 맞니?"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거죠. 저의 말을 충분히 들으신 후에는 "내 생각에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설득 논리가 펼쳐졌습니다. 

대화의 마지막은 항상 "나는 우리 딸을 믿는다"는 신뢰의 한마디로 끝이 났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그 대화에서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설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내가 그랬지..." 하고 동의를 한 상태로, 아버지의 방을 나오게 됩니다. 

지금 제가 밴쿠버에서 사업을 하며 스스로의 논리를 세우고, 직원들에게 제안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모든 소통의 원형은 바로 그 문 너머 아버지의 방에서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2018년 전북 남원 광한루원을 배경으로 활짝 핀 벚꽃 아래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 남원의 봄 풍경.


[기록] 2018년 봄, 남원 광한루에서
흐드러진 벚꽃 아래 선 나의 아버지와 어느덧 훌쩍 커버린 나의 아들. 나의 어린시절 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따듯한 말로 손자를 맞아주시는 모습은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요.

4. 55세 퇴직, 멈추지 않는 기획자의 제2인생 

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도가 본격화되던 시기에 아버지는 55세라는 나이로 공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아버지가 한가하게 집에 계신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버지는 스스로 '기획자'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드셨습니다.

  • 운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 회장 : 전국을 돌며 기록을 복원하고  후원을 추진하고 ,멋지게 운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 행사를 추진하셨습니다.

  • 바래봉 철쭉제 기획: 애향회장으로서 고향 축제를 현대적인 이벤트로 추진했습니다. 

  • 노인회장 등 그 후에도 고향의 길을 계속하셨죠.

  • 전북 최우수 게이트볼 팀: 노인회장 시절, 선수단을 이끌고 도내 최우수 성적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공무원 시절 운봉 종축장 유치를 위해 뛰셨던 것처럼, 퇴직 후에도 목표가 생기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밤낮없이 고민하며 방법을 찾으셨어요. 우리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집에 계시는 것 보다 낫지 않나라고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어요.  아버지 사진을 찿아 보니, 제가 보고 싶을 때면 앨범을 보시라고 친정에 앨범을 두고와 사진이 많이 없네요. 



2023년 친정 부모님과 우리 아들, 아들 녀석은 어느새 세컨더리를 졸업했고,그 시간 만큼 부모님은 나이가 드셨습니다.


5. 태산이 무너지던 날, 그리고 다시 찾은 희망 

가족과 고향을 지켰던 태산 같은 분. 전화할 때마다 "우리 딸 목소리를 들으니 엔돌핀이 도네"라며 다정한 응원을 주시던 아버지가 작년 4월 말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버지 얼굴이라도 봐야하지 않겠냐며 빨리 와, 라고 울먹이던 엄마의 부름에 1분기 GST 보고 준비를 채 마치지도 못한 채 급하게 한국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급성 심부전과 간부전으로 혈압이 40 아래까지 떨어졌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무작정 서울 아산병원으로 전원을 고집했고, 타비(TAVI) 시술 후 아버지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본인의 온 몸을 딸에게 맡길 정도로 위험하셨던 아버지는 최근 어머니의 80세 생신을 함께 축하하실 만큼 회복되셨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다시 느끼며 깊은 안도를 느낍니다. 

급성 심부전과 간부전으로  전주 예수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 간수치가 잡힌 후의 모습


전주예수 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 급성 심부전과 간부전으로 생사를 오가셨지만, 다행히 간수지가 잡히고 신장에 고여있던 물을 빼 내신 후의 모습.


어머니의 80세 생신을 맞아 손하트를 그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엄마. 아버지가 손수 준비하신  축하 현수막이 배경으로 보이는 가족 식사 장면.


엄마의 80순 생신기념 가족 식사 , 아버지가 손주 준비하신 엄마 여든 축하 기념 현수막 
비록 밴쿠버에서 마음으로만 함께했지만, 사진 속 아버님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병상을 털고 일어나신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직접 현수막 문구를 고민하고 준비하셨습니다. 평생을 '기획자'로 사신 아버지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이벤트, 그것은 가족을 향한 변치 않는 애정이겠죠? 두분이 함께 하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5. 결론: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

이제는 예전만큼의 기운은 아니시지만,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를 "내 방으로" 부르시던 그 지혜는 여전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저도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때나 비즈니스 판단을 내릴 때, 저는 혼자만의 논리를 치밀하게 세우는 과정을 즐깁니다. 아니, 자동적으로 논리부터 세우게 됩니다. 그래야만 제 이야기에 스스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말에 힘이 실린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지독하게 고민하고 논리를 구축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지금 제 모습에 겹쳐집니다. 밴쿠버에서 사업을 하는 제가 대화하는 방법을 만든 8할은 아버지에게서 배운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늘이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물며 저의  이정표로 오래 동안 남아 계시기를 바라고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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